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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고> 뻔뻔한 세상, 뻔한 내일:경기인신문

< 기고> 뻔뻔한 세상, 뻔한 내일

당현증 … 前부천시의회의원

| 입력 : 2020/08/17 [09:41]

염치는 인간의 표상이다. 부끄러움은 인간만의 특별한 마음이고 체면과 밀접하다. 체면은 인간관계를 전제한다. 남을 생각하는 도리가 체면이다. 도리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을 일컫는다. 차연(差延, deffarance)은 낱말의 순환과 연관이 깊은 언어의 연쇄작용이 있다.

인간의 바른 길이 사라진 요즈음 선악과 호오(好惡)의 중심을 흔드는 건 정객(政客)들이다. 그 위에 한 술 더하는 건 법치를 다루는 기술 전문 공인(公人)들이다. 중심이 흔들리면 주변은 파장으로 요동이 깊고 넓고 높다. 가장 하위를 이루는 건 장삼이사(張三李四)인 국민이다. 죄로 무게를 논하자면 가장 가벼울 수 있는 계층이다.

정객과 법인들은 공직이라는 이유로 세금으로 노임(勞賃)을 받는다. 공인들 모두 국민을 향해 가장 약할 수 있고 약해야하는 절대적 이유이다. 근저에 국민의 혈세가 바탕이기 때문이다. 그들 생존의 유일한 수단이 혈세로 충당되는 이유다. 도리와 염치는 공인의 흔들림 없는 기본이다.

부끄러움이 그들만의 담론이나 희언(戲言)일 수 없는 건 그 대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제 부끄러움을 알려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 자체도 버리려한다. 그 너머엔 몰염치가 난무한다. 부끄러움을 알려하지 않는 경지(?)를 넘어 무염치를 건너가고 있다. 무염치! 스스로 염치가 없다고 느껴 어색하고 겸연쩍어 하지도 않는 높은 경지다.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그들만의 파라다이스(paradise). 그들끼리의 긍정적이고, 조화롭고, 영원한 낙원(樂園)이다. 국민이 안중(眼中)에 있을 이유가 없다. 국민이 적()이어야 하는 형국인 건 당연하다.

이제 국민은 뻔뻔한 그들을 아주 히 알아 가고 있고 알고 있다. 그들이 지금 여러 행태로 열심히 가르치고 잘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체면이 남을 상대해야 할 경우 행해야 할 바른 경우라면 그 대상은 국민일터인데, 많이 아프다. 아니 앓아야 한다. 아픔을 건너고 넘으면 이력이 피어날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자연의 이법이다. 아상(我相)위에는 망아(忘我)가 기다림의 희망으로 존재한다.

뻔하다의 거룩한 의미에는 바라보는 것이 뚜렷하다가 다음으로 기다린다. ()와 견()과 각()은 심화를 일러주는 단계적 의미가 있다. 그 공통은 바라봄이고 보여짐이다. 보면 알게 되고 느끼고 깨달음으로 향한다. 작금의 정치 사태이고 법적인 상황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주지(周知)의 사실인 민심은 천심이다. 그들은 모르고 국민은 아는 이 비밀스런 사실이 천행(天幸)이다.

이제, 지민(知民)을 기다리는 고도(?)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발돋움하고 해야 한다. 그것만이 신성한 체면이다. 밑으로부터의 가르침의 길이 멀고 험하며 지루한 시간이더라도 가야할 뻔함이다. 이른바 굳이 확인해 보거나 경험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명확한 지민(知民)의 길이다.

새벽은 늘 춥고 시리다. 그러나 그럴수록 반드시 찬란한 태양이 분명히 기다린다. 그들만의 뻔뻔한 세상은 가고 국민의 뻔한 내일이 염치가 되어 저만치서 힘찬 손짓으로 반기고 있다. 지민만이 분명히 살아갈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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